북제 무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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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제 무성제(538년 ~ 569년)는 북제의 제4대 황제이다. 동위의 실력자 고환의 아들로, 550년 북제가 건국되자 장광왕에 봉해졌고, 이후 효소제, 폐제를 거쳐 561년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 사치스러운 생활과 폭정을 일삼아 간신을 등용하고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여 국정을 문란하게 했다. 565년 아들 고위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으며, 56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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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7년 출생 - 서위 공제
서위 공제 원곽은 서위 문제의 아들로, 폐제 폐위 후 우문태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실권 없이 우문씨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우문각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살해되어 서위는 멸망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연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 북제의 사도 - 곡률광
곡률광은 북제의 장군으로 북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요직을 거쳤으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다. - 568년 사망 - 양충 (북주)
양충은 남북조 시대 서위와 북주의 장군이자 수나라를 건국한 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로, 북위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서위와 북주를 거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북주 건국 후 원수로 임명되었고, 사후 아들 양견에 의해 무원황제로 추존되었다. - 568년 사망 - 우근 (인물)
우근은 남북조 시대 서위와 북주의 무장으로, 팔주국 중 한 명으로서 북위에서 무관으로 시작해 서위 건국에 기여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북제 무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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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무성제 고담 |
휘 | 고담(高湛)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무성황제(武成皇帝) |
생년 | 537년 |
몰년 | 569년 1월 13일 |
능묘 | 영평릉(永平陵) |
신분 | |
가문 | 고(高)씨 |
왕조 | 북제 |
재위 | |
즉위년도 | 561년 |
퇴위년도 | 565년 |
선대 황제 | 효소제 |
후대 황제 | 고위 |
연호 | 태녕(太寧): 561년 - 562년 하청(河淸): 562년 - 565년 |
가족 관계 | |
부친 | 고환 |
모친 | 누소군 |
배우자 | 호황후 |
2. 생애
고환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누소군이다. 538년 장광군공(長廣郡公)에 봉해졌고, 550년 북제가 건국되자 장광왕(長廣王)이 되었다. 559년 문선제 사후, 고은이 즉위하면서 태위가 되었다. 560년 대사마, 병주자사가 되었고, 효소제의 정권 탈취에 협력하여 태부가 되었다. 561년 11월 효소제가 죽자 황제 자리에 올라 진양의 남궁에서 즉위했다.[1]
황제가 된 후에는 사치와 백성을 동원한 부역에 힘써 폭군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화사개(和士開) 등의 간신을 등용하여 그 전횡을 허락했고, 이는 북제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1] 고장공(高長恭)이나 곡률광(斛律光)과 같은 명장들이 있었음에도 간신을 등용하여 나라를 어렵게 하였다.
564년에는 이전에 황태자였던 효소제의 아들 고백년을 죽였다.[1]
565년 4월, 아들 고위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제가 되어 정무를 보았다.[1] 568년 12월에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고환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누소군이다. 북위 효무제의 황후 고씨, 고징, 동위 효정제의 황후 고씨 (태원장공주), 고양(문제), 고연(효소제), 고제 (박릉왕)의 동복 형제이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기품과 수려한 외모를 지닌 미소년으로 칭송받았다. 538년 장광군공(長廣郡公)에 봉해졌다.544년, 아버지 고환은 유연과의 동맹을 위해 유연 칸 위쥐뤼 안루오천의 딸을 아들 고담의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린허 공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담은 결혼식에서 적절한 행동을 보여 하객들을 놀라게 했다.
550년 형인 문선제가 북제를 건국하자 장광왕(長廣王)으로 봉해졌다. 상서령을 지냈고, 곧 사도를 겸했다.
2. 2. 문선제 치세
550년 형인 문선제가 북제를 건국하자 장광왕(長廣王)으로 봉해졌다. 상서령을 지냈고, 곧 사도를 겸했다.[1] 559년 문선제가 사망하고 고은이 즉위하자, 태위로 전임되었다.[1]문선제의 치세 초기에는 근면했으나, 점차 폭력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술에 취하면 형제들을 구타하는 일이 잦았고, 그의 두 형제인 영안왕 고준과 상당왕 고환(아버지와 다른 글자임에 유의)은 투옥되었다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고담이 그들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는데, 문선제가 559년경에 그들을 석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고준과 증오 관계에 있던 고담은 문선제에게 "어찌 맹수를 우리에서 풀어주려 하십니까?"라고 말했고, 문선제는 이에 동의하여 그들을 죽였다.) 이 시기에 고담은 화사개와 조정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고, 이들은 훗날 고담의 통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2. 3. 효소제, 폐제 치세
559년 문선제가 사망하고 폐제가 즉위하면서, 고담은 태위가 되었다.[1] 560년 고담은 대사마, 병주자사가 되고, 효소제의 정권 탈취에 협력하여 태부가 되었다.[1] 561년 11월, 효소제가 사망하자 고담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1]고담은 황제가 되기 전, 효소제에게 태자로 임명될 것을 약속받았으나, 효소제는 자신의 아들 고백년을 태자로 세웠다.[1] 561년, 효소제는 야성에서 고담의 권한 중 일부를 곡률금의 아들 곡률선에게 이양하려 했지만, 고담은 이를 거부했다.[1] 한편, 점술가들은 효소제에게 황제의 기운이 여전히 야성에 있다고 알렸고, 이는 효소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1]
고은이 다시 황위를 차지하고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 고귀언은 효소제에게 고은을 제거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효소제는 고은을 진양으로 소환하여 죽였다.[1] 효소제는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사망 직전, 고백년은 황위를 잇기에 너무 어리므로 고담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조서를 내렸다. 또한 고담에게 "백년은 죄가 없습니다. 그를 가지고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제발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1]
2. 4. 황제 즉위와 통치
고환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누소군이다. 538년 장광군공(長廣郡公)에 봉해졌고, 550년 북제가 건국되자 장광왕(長廣王)이 되었다. 559년 문선제 사후, 고은이 즉위하면서 태위가 되었다. 560년 대사마, 병주자사가 되었고, 효소제의 정권 탈취에 협력하여 태부가 되었다. 561년 11월 효소제가 죽자 황제 자리에 올라 진양의 남궁에서 즉위했다.[1]황제가 된 후에는 사치와 백성을 동원한 부역에 힘써 폭군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화사개(和士開) 등의 간신을 등용하여 그 전횡을 허락했고, 이는 북제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1]
564년에는 이전에 황태자였던 효소제의 아들 고백년을 죽였다.[1]
565년 4월, 아들 고위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제가 되어 정무를 보았다.[1]
2. 5. 북주의 침공과 대응
563년 겨울, 북주는 북제를 상대로 대규모 양면 공격을 감행했다. 다계무(達奚武)가 지휘하는 남쪽 공격은 산시 린펀의 평양(平陽)을 공격했고, 돌궐과 동맹을 맺은 양충(楊忠)이 지휘하는 북쪽 공격은 북쪽에서 북제를 공격했다. 무성제는 장군 후려광을 보내 북주의 남쪽 공격에 대응하게 하고, 직접 진양으로 가서 북쪽 공격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진양에 도착했을 때 북주와 돌궐의 병력이 너무 강하다는 사실에 놀라 도주를 고려했으나, 고예와 고소완(高孝琬) 하간공의 반대로 도주를 멈췄다. 564년 봄, 단소(段韶)는 양충을 격파하여 도주하게 했고, 돌궐 군대와 다계무는 곧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양 북쪽의 북제 영토는 돌궐에 의해 약탈당했다.한편, 북주의 섭정 우문호는 관리 윤공정(尹公正)을 보내 그의 어머니 연 부인과 그의 고모(그의 아버지 우문호(宇文顥)와 삼촌 우문태)의 반환을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다. 무성제는 북주와 돌궐이 또 다른 공격을 감행할까 두려워 동의했고, 먼저 우문 부인을 북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연 부인을 억류하고 그녀와 우문호가 서신을 교환하게 하여 우문호로부터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다. 단소는 공식적인 양보를 협상하라고 제안했지만, 무성제는 우문호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564년 가을에 연 부인을 풀어주었다.
564년 겨울, 돌궐이 북제의 북부 지역을 공격하자, 우문호는 돌궐이 그를 배신자로 생각할까 두려워 북제를 공격했고, 핵심 도시 뤄양을 공격했다. 565년 새해 즈음에, 단소와 고장공 난릉공이 뤄양을 포위한 북주 군대를 격파했고, 북주 군대는 철수했다.
2. 6. 양위와 죽음
561년 11월에 효소제 고연이 죽자 진양의 남궁에서 즉위했다. 565년 4월, 아들인 고위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태상황제로서 정무를 보았다. 568년 12월에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다.고위의 어린 나이 때문에, 무성제는 "퇴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결정들을 계속 통제했다. 그는 또 다른 아들인 고연 (효소제와 다른 글자) 동평왕을 매우 총애했다. 고연은 고위보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성제는 고연에게 많은 명예와 칭호를 부여했으며, 고위보다 더 지적이고 결단력이 있다고 여겨진 고연은 때때로 고위가 왜 황제가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무성제와 호황후는 고위를 폐위시키고 고연으로 대체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다.[1]
568년 봄, 무성제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고, 뛰어난 의사인 관료 서지재(徐之才)가 그를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무성제가 회복된 후, 서지재보다 지위가 낮았던 화사개는 승진을 원했고, 그래서 서지재를 연주(兗州, 대략 현대 지난, 산둥성)로 보내 태수로 삼았다. 568년 겨울, 무성제는 갑자기 다시 병에 걸렸고, 서지재를 소환했다. 그러나 서지재가 도착하기 전에, 569년 새해 즈음에 그는 화사개의 손을 잡고 중요한 일들을 그에게 맡긴 채 사망했다.[2]
3. 가족 관계
무성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정실: 욱구려암라진의 딸 욱구려질지련(柔然의 임하공주), 호황후
- 측실: 홍덕부인 이씨, 부인 팽씨(팽락의 딸), 빈 왕씨, 빈 노씨, 빈 마씨, 어녀 이주마녀, 임씨
자녀는 다음과 같다.
- 고위 (차남, 호황후 소생)
- 고작 (서장자, 홍덕부인 이씨 소생, 고위와 같은 날 출생)
- 고엄 (삼남, 호황후 소생)
- 고곽 (사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정 (오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영 (육남, 594년까지 생존, 촉에서 사망)
- 고인광 (칠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기 (팔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옹 (구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검 (십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아 (십일남, 촉으로 유배 후 사망)
- 고인직 (십이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고인겸 (십삼남, 북제 멸망 후 장안에서 처형)
- 영창공주 (요절)
- 동안공주
- 이조아 소생의 딸
『북제서』 유주전에는 "신무(신무황제 고환)의 자손으로서 살아남은 자는 한두 명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 때문에 죽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고인영과 고인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성제의 조카(맏형 고징의 삼남)인 난릉왕 고장공의 손자 고원간과 무성제의 넷째 아들 고곽의 자손(고곽의 증손 대까지)이 수와 당 시대를 살아남았다.
3. 1. 황후
무성황후 호씨(胡氏)[4]는 562년부터 565년까지 황후였다.
3. 2. 후궁
3. 3. 황자
순번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별칭 | 비고 |
---|---|---|---|---|---|---|---|
1 | 황태자 | 고위 | 556년 ~ 577년 | 황후 호씨 | [7] | 제5대 황제 후주. | |
2 | 남양왕 | 고탁 | 556년 ~ 574년 | 홍덕부인 이씨 | [8] | ||
3 | 낭야왕 | 고엄 | 557년 ~ 571년 | 황후 호씨 | [9],[10] | ||
4 | 제안왕 | 고곽 | [11] | ||||
5 | 북평왕 | 고정 | |||||
6 | 고평왕 | 고인영 | |||||
7 | 회남왕 | 고인광 | |||||
8 | 서하왕 | 고인기 | |||||
9 | 낙평왕 | 고인옹 | |||||
10 | 영천왕 | 고인검 | |||||
11 | 안락왕 | 고인아 | |||||
12 | 단양왕 | 고인직 | |||||
13 | 동해왕 | 고인양 |
3. 4. 황녀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부마 | 비고 |
---|---|---|---|---|
영창공주 | ? ~ 562년 | 제북왕 단심 | 단소의 차남 단심과 약혼했으나, 혼인하지 못하고 562년에 요절했다. | |
동안공주 | 단심 | 564년 단소의 차남 단심과 혼인하였다. | ||
이조아 소생의 딸[1]: 무성제가 이조아를 강요하여 낳은 딸이다. 이조아가 전 남편 고소덕을 만나지 못하게 하자, 고소덕은 "어머니는 임신하셨으니 저를 만나주지 않으시는군요"라고 꾸짖었다.[1] 이조아는 부끄러워하며 딸을 데려가지 않았고, 무성제는 이조아 앞에서 고소덕을 칼로 찔러 죽였다.[1] |
4. 연호
참조
[1]
서적
Kingship in Early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BRILL
2008-01-01
[2]
문서
読みは「せいきょう」。狂人ではないが言行が常軌を逸していて狂人と似ているもの。また、そのさまを意味する。
[3]
문서
読みは「いんしつ」。喉の病を意味する。ちなみに、「瘖」という漢字が使用されている語として「瘖唖者」という語があるが、こちらは聴覚機能と言語機能を共に欠いているものを意味する。
[4]
문서
장광왕비(長廣王妃)/태상황후(太上皇后)/황태후(皇太后)/무성황후(武成皇后)
[5]
문서
인화공주(隣和公主)
[6]
문서
유연 (나라)|유연]]의 가한 아나괴(阿那瓌)의 손녀. 장광공 시절의 정실이였으나 북제 건국 전에 사망함. 황후로 추존되지 않음
[7]
문서
장광왕세자(長廣王世子)/후주(後主)
[8]
문서
한양왕(漢陽王)
[9]
문서
동평왕(東平王)
[10]
문서
사후 후주에 의해 초공애제(楚恭哀帝)로 추존됨.
[11]
문서
북제 멸망 후 파릉군개국공(巴東郡開國公)으로 강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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